내 인생을 바꾼 한 권의 책


가을햇살이 유난히 따가웠던 어느 날이었다. 우리 집에서도 여느 집과 마찬가지로 추수에 한창 바빴다. 그날은 탈곡기로 벼이삭을 터는 타작 날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한 움큼 볏단이 탈곡기 촉수에 많이 닿을 때와, 조금 덜 닿을 때 들리는 소리가 달랐다. 한쪽을 털고 난 후 다른 쪽을 털기 위해 잠시라도 기계와 볏단 사이가 멀어지면 그 소리는 곧 바뀌어 ‘아-롱 아-롱’ 하는 소리로 들렸다.

 그래서 동네 아이들은 탈곡기를 ‘아롱’이라고 불렀다. 새 볏단을 들이밀면 그 소리는 더욱 거칠어졌고 그럴수록 마당 가운데는 벼가 쌓여갔다.

 내가 아버지를 돕는 일은 멀리까지 튕겨나간 벼 낱알을 빗자루로 쓸어 마당 한가운데로 모으는 작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날따라 머릿속은 온통 다른 생각으로 가득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우체부를 기다리는 일이었다.

 며칠 전 과학 잡지에서 ‘아마추어무선(햄.Ham)’이라는 책 광고를 보고 알 듯 모를  듯 한 무선교신 이야기가 내 마음을 온통 빼앗았다. 그리고 그날로 우체국에 달려가 주문을 하였던 것이다. 그때부터 그 책에 실려 있을 내용을 상상하느라 가슴이 쿵쾅쿵쾅 거리는 묘한 기분에 사로 잡혀 있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논과 밭과 파란 하늘뿐인 시골생활에서 무선통신은 아득한 미지의 세계였다. 라디오와는 또 다른 세상일 것임이 분명했다. 마치 무언가를 새로 발견할 것 같은 기대감이 내 마음을 풍선처럼 마냥 부풀게 했다.

 손가락을 꼽아보니 이르면 그날, 늦으면 다음날이 도착할 날짜였다. 그럼에도 아침부터 우체부를 기다리느라 가슴은 설렜고 시간은 정말로 더디게 흘러만 갔다. 그 때문에 그 잘난 작은 일마저 도통 손에 잡히질 않았다. 눈이 빠지도록 기다렸던 우체부 아저씨는 점심시간이 지나서야 모습을 나타냈다. 곧 우리 집 쪽으로 자전거의 핸들을 트는 게 보였다. 순간 얼마나 반가웠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달려가서 책을 받았다. 그런 후 그 자리에서 읽기 시작했다. 책은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그림처럼 한눈에 쏙쏙 들어왔다.

 전 세계적으로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들끼리의 무선통신 체험담, 그리고 교신으로 싹튼 우정과 에피소드는 나의 호기심을 가득 채우고도 남았다. 그냥 한달음에 다 읽어버렸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른다. 빗자루는 팽개친 채 말이다. 어렴풋한 기억이지만, 초등학교 바른생활 교과서에 실렸던 ‘난치병을 앓고 있는 환자에게 무선통신으로 페니실린을 공수하여 생명을 구했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날 이후 그 책을 목차에서부터 지은이, 출판사가 나오는 맨 뒷장까지 몇 번이나 읽고 또 읽었는지 모른다. 분명 새로운 그 무엇이 내 앞에 서있는 것이었다. 푹 빠졌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짜릿한 중학교 1학년 때의 기억이다.

 이때부터 나의 진로는 오로지 ‘무선통신’으로만 굳어져갔다. 자나 깨나 무선이었다. 용돈이 생기면 가장 먼저 전파사를 찾았다. 당시 읍내 전파사에는 일제 단파(短波)라디오가 종종 있었다. 아마추어무선사들의 대화를 청취하려면 반드시 그것이 필요했다. 그래서 고장 난 라디오, 중고 라디오를 사들이기 시작했다. 과학 잡지도 정기구독으로 바꾸었다. 처마 밑 빨랫줄은 안테나로 둔갑했다.

 학교에 다녀오면 수신기 스위치를 먼저 켜고 책가방을 내려놓았다. 무엇이든 사가지고 오면 부수고 조립했다. 공부방은 점점 고물상이 되어갔다. ‘뿌-’하고 강한 소리가 나던 버저를 ‘브르브르’ 하는 부드러운 소리가 나도록 제작했다. 그 경험을 ‘월간 전자과학’ 잡지에 투고 했다. 그 기사를 보고 인근 한전 직원이 연락을 하여왔다. 그는 중학생인 나를 시내 한정식 집으로 데려가 식사를 사주며 정성껏 대해주었다. 그 자리에서 우리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서로의 관심사에 대한 정보교환을 했다.   서울에 있는 아마추어 무선연맹을 수소문한 끝에 회원으로 가입했다. 전용봉투도 인쇄하여 썼다. 형님 댁에서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내 이름 앞에 ‘***씨방’ 이라는 문구를 넣었다. 그러고 보니 주위에는 물론이고 내가 사는 도(道)내에 아마추어무선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게 안타까울 수가 없었다. 궁리 끝에 이웃 충주 시(市)에 위치한 지방 방송국에 편지를 썼다. “~이러이러 한 취미가 있는데 우리지역은 불모지이고~ 아무튼 알려야겠다.” 는 요지의 내용이었다. 그 결과 초대석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되었고 인근지역에서 두 명의 지망생을 찾아냈다.

 지금 생각해도 맹랑한 것은 당시 인터뷰에서 나는 학생임을 밝히지 않았다. 그냥 제천 중학교에 있다고 했다. 아마 어린마음에도 어린 것을 보이기 싫었던 모양이다.

 

첫 번째 열병에서 유학으로


 무선통신에 빠지면서 그 불길은 전혀 뜻하지 않은 곳으로 옮겨갔다. 문득문득 자퇴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도대체 어느 세월에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다닐 것이며, 그렇다면 진정 나의 갈 길은 요원해지고 말 것이라는 조바심이 부채질했다. 그러나 부모님께서 자퇴를 허락해 주실 리 만무했다. 방법이라면 가출 밖에 없었다. 내 머릿속은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오로지 가출만이 살길이었다. 그보다 좋은 방법은 없을 것 같았다. 나중에는 ‘가출을 꿈꾸다’, ‘가출을 하다’, ‘서울학원에 입학 한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가족에게 편지를 쓰는’ 상상까지 하게 되었다. 끝내 이루지 못했던 가출이었지만 내게는 무척이나 길게 느껴졌던 첫 번 째 열병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