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폰으로 불륜 자랑마라

 

[뉴스메이커 2004-02-27 14:14]

"이런 도청은 붙잡기가 힘듭니다."

2 월 19일 경기도 고양경찰서는 황당한 사건의 범인을 붙잡았다고 밝혔다. 무선전화기의 통화내용을 도청한 뒤 불륜사실을 폭로하겠다고 협박, 돈을 요구한 권모씨(43)가 사건의 주인공. 모텔 등에서 몰래카메라 등을 찾아내고 수고비를 받는 사업을 해왔다고 주장하는 권씨는 자신의 주장과는 달리 도청을 막는 대신 도청을 저질렀다.

공중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전파가 떠다니고 있다. 집이나 사무실에서 사용하는 무선전화기도 이런 전파를 발산한다. 수신기 주파수를 이리저리 돌려 이 전파를 잡으면 무선전화기로 통화하는 내용을 들을 수 있다. 권씨는 전자상가에서 수신기와 안테나, 녹음기를 구입해 도청 준비를 한 뒤 주파수를 이리저리 맞춰 공중에 떠다니는 무선전화기 통화내용을 들었다.

그러던 중 그의 안테나에 300m정도 떨어진 빌딩에서 근무하는 오모씨(39-여)가 친구와 통화하는 내용이 잡혔다. 내용이 심상치 않았다. 친구와 함께 서로의 불륜을 자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주파수를 고정하고 녹음을 시작했다. 기다렸다가 오씨가 전화를 사용하면 녹음하는 일을 반복했다.

결 국 그의 손아귀에 잡힌 것은 오씨와 통화하며 자신의 불륜을 자랑하던 여자친구 두 명이었다. 통화내용을 들으면서 권씨는 이들이 누구인지 파악하려 애썼다. 협박을 하려면 통화당사자가 누구인지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통화내용에 전화번호와 이름이 등장했다.


친구와 서로의 불륜 잡담 들통


그 는 불륜 내용을 2시간 분량의 테이프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가 알아낸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씨죠? 택배인데 주소를 알려주세요"라고 속였다. 오씨가 근무하는 곳을 알아낸 것이다. 그는 택배원을 가장한 뒤 협박 내용을 담은 노란봉투를 근처에 놓고 왔다.

그는 다시 오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에 물건을 놔뒀으니 찾아보라'는 내용이었다. 노란봉투에는 불륜사실이 녹음된 테이프와 협박 내용을 담은 A4용지 5장이 있었다. 주 내용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마라. 한 사람이 1천만원씩, 총 3천만원을 내놔라.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남편에 알리겠다'였다. 알고 보니 오씨뿐 아니라 오씨와 통화를 했던 친구도 협박을 받았다고 한다. 고민하던 오씨는 1월 28일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우선 통화추적에 들어갔다. 오씨에게 걸려온 전화를 조사한 결과 '선불폰'과 공중전화를 사용한 사실을 알아냈다. 선불폰은 요금을 미리 지불하고 사용하는 휴대전화라 사용자가 누구인지 파악할 수 없었지만 부산 사하구 초량동에서 팔렸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위치 추적을 했지만 정확한 위치는 파악할 수 없었다. 공중전화를 조사한 경찰은 권씨가 오씨 근무지 근처의 공중전화 여러 대를 번갈아가며 사용했다는 점을 파악할 수 있었다. 동선을 파악해보니 'ㄱ'자 형태로 전화를 걸며 움직였다.

경찰은 일대의 공중전화 부스를 포위하고 권씨에게 전화가 걸려오기를 기다렸다. 기다리던 전화가 왔지만 공중전화가 아닌 '선불폰'을 사용한 전화였다. 주변공중전화를 감시하던 경찰은 권씨를 잡지 못했다.

협 박당한 여성들은 2월 11일 낮 12시 경기도 고양시 화정동 화정터미널에서 범인을 만나기로 했다. 시간을 끌면 권씨가 남편들에게 불륜을 알릴 우려가 있어 빨리 범인을 붙잡기 위해서였다. 시간이 되자 전화가 걸려왔다. 공중전화 번호였다. 대기하고 있던 경찰은 컴퓨터를 통해 위치를 파악한 뒤, 공중전화 부스에서 나오는 권씨를 덮쳤다.

권씨의 오피스텔을 수색한 경찰은 깜짝 놀랐다. 오씨에 관한 테이프뿐 아니라 다른 테이프도 있었기 때문이다. '잘나가는 여자' '○○○엄마' 등의 제목과 함께 주파수가 적혀 있는 테이프가 30개 정도 있었고, 협박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 7~8개 있었다. 만약 오씨 등이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더라면 더 큰 피해가 발생할 뻔했던 것이다.


도청장치 전자계산기 빨리 닳는다


이번 사건은 도청이 얼마나 쉬운지를 잘 보여준다. 지금까지의 일반적인 도청은 현장에 도청기를 설치하고 외부에서 신호를 잡아 녹음하는 방식이었다. 이런 장치에는 여러 형태가 있다. '전화 플러그형 도청기' '전화분배기형 도청기' '전자계산기형 도청기' '멀티탭형 도청기' '전기 플러그형 도청기' '콘크리트 마이크형 도청기'가 대표적인 예다. 이런 장비는 인터넷을 통해 구할 수 있다. 도청방지 전문업체인 한국통신보안의 안교승 대표는 "도청 원리를 잘 모르는 사람도 장치만 구입하면 쉽게 도청할 수 있다"며 "이런 장치는 현장에서 종종 발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자신이 도청을 당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우선 자신이 공개적으로 하지 않은 이야기가 남의 입에서 흘러나오면 도청 가능성이 높다. 이런 경우 자신이 생활하는 곳에 평상시와 다른 점이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도청기가 설치된 전자계산기는 전지가 평상시보다 빨리 닳는다. 플러그형이나 콘센트형 도청기는 조금만 신경을 쓰면 발견할 수 있다. 요즘에는 도청장치를 탐지하는 장비도 쉽게 구할 수 있기 때문에 이를 사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장치를 발견하지 못했지만 의심이 계속되는 경우에는 보안업체에 의뢰할 수도 있다. 비용이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이를 감수하면 도청장치를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의 경우는 다르다. 무선전화기와 본체 사이에 흐르는 전파 중 외부로 나가는 전파를 수신기로 잡아 도청하기 때문에 현장에 도청장치를 설치할 필요가 없다. 라디오를 켜듯 근처에서 수신기 하나만 작동시키면 통화내용을 엿들을 수 있다.

이런 까닭에 도청을 해도 붙잡기가 힘들다. 이번 사건처럼 협박을 하면 범인을 잡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잡기 힘들다. 지속적인 도청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이에 안교승 대표는 "디지털 방식의 무선전화기는 도청하기 힘들지만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전화기는 도청되기 쉬운 아날로그 방식"이라며 "피해를 막기 위해서는 중요한 통화나 텔레뱅킹 등은 유선전화를 통해서 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충고했다.

정재용 기자 politika95@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