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감청 방지 시장, 음지서 급성장

 

[주간조선 2004-02-09 17:42]
누군가 전화에 속삭이는 소리를 엿들을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 달콤한 유혹이다. 반대로 누군가 내가 전화로 하는 이야기를 가로채 듣고 있다고 생각하면 소름이 끼칠 정도로 공포스러운 일이다. 요즘 자주 사용하는 이메일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최근 수사기관이 기자들이 취재하기 위해 통화한 내역(통화 상대 전화번호·통화 시각 등)을 통신 회사에서 받아 관련자들을 조사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다시 통신 보안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정 보통신부 담당자는 "통신 관련 기기는 모두 형식 인증을 받아야 하지만 도청 방지용 비화기는 형식 승인을 내준 적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즉 "도청 방지용 비화기는 군이나 정부기관에만 형식 승인을 내주었을 뿐 민간 판매용 제품으로 허가를 내준 적이 없다"는 것이다.

정부 입장대로라면 휴대전화 도청 방지용 장비를 파는 업체도 구입한 업체나 개인도 없어야 정상이다. 그러나 업계에서는 유선전화는 물론이고 휴대전화 도청을 방지할 수 있는 장치까지 구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공공연히 한다. 대략적인 가격도 나와 있다. 비화기를 사용할 필요가 있는 기업 관계자들은 "비화기 대당 가격이 100만~200만원선"이라고 말한다.

물론 판다는 업체도 있다. 2002년부터 국내에서 비화기를 제작, 판매해 온 ㈜컴섹 관계자는 "2002년 대선 이후 비화기에 대한 관심이 커져 현재까지 1000대 이상 팔았고 지금도 하루 평균 30~40건씩 문의가 들어온다"고 말했다.

컴섹측은 이 제품이 비화기가 아니라 암호단말기로 허가를 받은 제품이라는 입장이다. 암호단말기는 통신을 암호화한다는 뜻이다. 결국 도청을 방지할 수 있다는 의미다. 결국 비화기와 같은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이다.

회 사측은 "원래 유선전화 도청 방지용 장치이지만 유선전화를 경유하는 방법을 사용한다면 휴대전화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제품"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기밀 유출을 막기 위한 기업체의 관심이 커지고 있다고 한다. 이 관계자에 따르면 비화기는 컴섹을 비롯, 컴섹이 기계를 공급하는 5~6곳에서 구입할 수 있다. 공식허가를 받은 도청 방지 장치는 없지만 도청 방지 장치가 인기리에 팔리고 있는 셈이다.


공식 통계는 아직 없어


"국내 유선 도청 방지 시장 점유율 70%를 차지하고 있다"는 한국통신보안㈜의 안교승(42) 사장은 "정확하지는 않지만 도청 방지 시장 규모가 대략 200억~300억원 규모는 될 것"이라고 말했다. ㈜컴섹 관계자는 시장 규모를 "500억원 정도"라고 추산했다. 도청 방지 등 정보 보호 관련 시장 규모가 작년에 이미 1500억원에 이른다는 주장을 하는 업체도 있다.

업체나 업계 전문가 누구에게 물어보는가에 따라 시장 규모가 몇 배씩 차이가 나는 상황이다. 물론 공식 통계는 전무한 실정이다. 안 사장은 "도청 방지 업체가 수십 곳에 달한다"고 했다. 도청 방지 산업은 보이지는 않는 ‘어둠 속의 시장'이지만 더듬어보면 손 끝에 느낌이 오는 실체가 있는 시장인 셈이다. 게다가 그 규모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다.

안 사장의 주요 고객은 정치인·고위 공무원, S·H 등 굴지의 대기업을 포함한 업체 500여곳. 이전 국무총리의 요청에 따라 집무실과 공관 등에 대해 보안 검색을 실시한 적도 있다. 어둠 속에서 일하는 안 사장은 실제로 모두가 잠자는 새벽 2~3시에 사무실을 ‘기습'해 보안 점검을 하기도 한다고 한다. 장비는 포장 이사용 박스에 넣어 옮긴다. 건물에 진입할 때는 빌딩 대청소라고 속이기도 한다. 주요 기업이나 기관의 3~4%는 매달 정기 검색을 할 때 도청 흔적이 드러난다.


1월 한 달 간 도·감청 방지 문의 60~70건


안 사장은 "대선자금 수사가 시작된 지난해 말부터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도청 방지에 대한 문의가 늘고 있다"고 했다. 올 1월 한 달 동안 문의 건수는 60~70건. 지난해 1월에 비해 20% 정도 증가했다. 업체 관계자들은 올해 총선을 앞두고 도청 방지 수요가 더욱 늘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유선·무선 도청 방지 장비 가격은 각각 150만원선, 여기에 매달 관리비를 내야 해 부담이 만만치 않다. 그러나 안 사장은 "최근에는 일반인 사이에서도 도청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져 개인들이 하루 10여건씩 문의 전화를 하는 날도 있다"고 말했다.

통신 보안 부문은 일반인에게는 미지의 영역일 수밖에 없다. 우선 통신 도ㆍ감청은 결국 수학 문제다. 통신 내용을 암호화하고 다시 푸는 과정이 고차원적인 수학 문제를 푸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일반인들이 접근하기 힘든 것은 물론이다.

또 통신 보안 문제에 대한 정보에 일반인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가장 큰 이유는 관련 산업 종사자들이 사실상 모두 국가 조직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이 문제를 다루는 공식적 기관은 국가보안연구소(국보연)가 유일하다.

과 거 국가 암호 관련 연구 용역을 전담하다시피 한 한국전자통신연구소(ETRI) 암호 관련팀을 주축으로 만들어진 국보연은 그 성격상 주로 국가기관의 용역을 받아 일한다. 군이나 정보조직에서 사용하는 암호 체제를 만든 국보연은 한국에서 가장 비밀스런 연구소라고해도 지나치지 않다.

연구소에서 나와 민간 보안 업체를 만들거나 민간 보안 업체에서 일하는 연구원들도 있지만 그들은 모두 과거 자신이 한 일이나 연구원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굳게 입을 다물고 있다. 민간 업체에서 일하더라도 결국 국가기관을 상대로 일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산업 규모가 커져도 그 정확한 내용을 파악하기 힘든 이유는 통신 보안 사업의 속성 때문인 것이다.

또 도·감청 방지 장치 판매에 대한 법률 조항이나 규칙도 모호하기 그지없다. 때문에 정부가 비화기를 팔 수 있도록 형식 허가를 내주지 않았지만 사실상 소비자는 비화기를 살 수 있는 모순이 생기기도 한다. 정부는 휴대전화 도청이 불가능하다는 입장이지만 소비자들은 한 걸음 나아가 도청 방지 장치를 살 수 있다고 믿고 있고 구입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정통부 관계자는 "시중에 팔리고 있는 제품에는 신뢰도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정부가 공인한 제품이 없는 상황에서 신뢰도를 논의할 수가 없다. 제품에 대한 기준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백강녕 조선일보 산업부 기자(young100) 김승범 주간조선 기자(sbkim@chosun.com)


◆ 통신비밀보호법 논쟁

계좌추적은 당사자에게 통보, 통화 내역은 통보 안해


국 정원이 국민일보 기자의 통화 내역을 추적한 법적 근거는 ‘통신비밀보호법'이다. 통신비밀보호법 제 1조는 ‘통신 및 대화의 비밀과 자유에 대한 제한은 그 대상을 한정하고 엄격한 법적 절차를 거치도록 함으로써 통신비밀을 보호하고 통신의 자유를 신장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통신비밀보호법이라 불리는 법률이 반대로 통신 내역 확인의 근거가 됐다는 사실은 아이러니다.

정 보기관이 통화 내역을 통신사로부터 입수한 직접 근거는 13조 2항이다. 13조 2항은 ‘정보수사기관의 장은 국가안전보장에 대한 위해를 방지하기 위하여 정보수집이 필요한 경우 전기통신사업자에게 통신사실 확인 자료 제공을 요청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사실상 이번 건을 국가안전보장과 연관시켜 말하는 사람도 생각하는 사람도 찾아보기 힘들다.

또 이와 별도로 통화 내역을 수사 기관에 제공한 다음 당사자에게 이를 통보하지 않는다는 것도 인권 침해 소지가 크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김태수 변호사는 "금융계좌를 추적할 경우 법적으로 그 내용을 당사자에게 통보해야 한다"며 "전화 통화 내역은 어떤 의미에서는 금융 거래 정보보다 더 민감하고 더 사적인 영역"이라고 지적했다. 법이 현실 발전을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김 변호사는 "인권 보호란 차원에서 관련법을 이른 시일 안에 정비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 정치인과 도·감청

"모두 도·감청 가능" 휴대전화 보통 2~3개


정 치인들은 도·감청 문제에 민감하다. 특히 정보기술에 밝은 정치인이나 도·감청 실태를 잘 알고 있는 정치인일수록 그런 경향이 강하다. 검사 출신으로 국가안전기획부 제1차장을 지낸 정형근 의원이 쓰는 휴대전화는 10여개에 달한다. 그는 매달 그 가운데 2~3개의 전화기와 번호를 바꾼다. 보통 그와 통화하려면 보좌관에게 연락을 한 다음 정 의원이 전화를 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한 측근은 "바뀐 번호를 수행비서에게도 알려주지 않아 수행비서가 그를 찾기 위해 당직자들 방을 모두 다 뛰어다닌 적도 있다"고 말했다. 감청의 본산인 정보기관에서 오래 근무한 정 의원은 "통신망을 지나는 이야기는 모두 도청당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국회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에서 활동하며 휴대전화 도·감청 문제로 관련 정부 기관을 애먹이고 있는 김형오 의원도 휴대전화가 2개다. 그 가운데 하나는 자기 명의 전화가 아니다. 그는 굳이 2개를 쓰는 이유를 길게 설명하지 않는다.

역시 과학기술정보통신위 소속 박진 의원은 휴대전화가 1개뿐이다. 그러나 박 의원의 보좌관들은 "박 의원은 아예 전화로 길게 이야기 하지 않는다"고 한다. "중요한 얘기는 직접 얼굴을 맞대고 한다"는 것이다.

야당 당직자들은 휴대전화를 보통 두서너 개씩 들고 다닌다. 그래서 바지 주머니가 언제나 불룩하다. 갖고 다니는 휴대전화 주인은 서류상으로는 다른 사람이다. 한 당직자는 "친구 회사의 여직원 명의 휴대폰이 제일 많다"고 했다.

백강녕 조선일보 산업부 기자(young100@chosun.com)